사쿠마 쓰토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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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쿠마 쓰토무는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으로, 1901년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러일 전쟁에 참전했다. 잠수함 부대에서 근무하며 1908년 일본 최초의 국산 잠수함인 제6잠수함 함장을 역임했다. 1910년 4월 15일, 훈련 중 제6잠수함 침몰 사고로 승무원 14명과 함께 사망했다. 사고 당시의 상황과 유언이 담긴 그의 일기는 큰 감동을 주었고, 사쿠마는 사후 국가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그의 기일에는 기념 행사가 열리며, 유서는 오늘날까지도 일본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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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마 쓰토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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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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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사쿠마 쓰토무 |
출생일 | 1879년 9월 13일 |
사망일 | 1910년 4월 15일 |
출생지 | 후쿠이현 |
사망지 | 세토 내해 |
소속 | 일본 제국 |
군 종류 | 일본 제국 해군 |
복무 기간 | 1901년-1910년 |
최종 계급 | 해군 대위 |
주요 지휘 경력 | |
지휘 | 제4 잠수함 제1함대 참모 구축함 하루카제 (春風) 제6 잠수함 |
주요 참전 | |
전투 | 러일 전쟁 |
2. 생애
후쿠이현 와카사정의 신사의 신관 집안 출신인 사쿠마는 1901년에 해군병학교를 29기로 졸업했다.[5] 졸업 후 일본 제국 해군에 임관한 사쿠마는 러일전쟁에서는 순양함인 아즈마, 가사기 등에 배속되어 쓰시마 해전에 참여하였다. 미카타군 후쿠이현(현재 와카사시 시)에서 신관(神官) 집안에서 태어난 사쿠마 쓰토무는 1901년 제29기 일본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동기생 중에는 후일 해군성 대신 겸 일본 총리가 된 요나이 미쓰마사가 있었다. 1903년, 소위로 진급하여 같은 날 순양함 「아즈마」에 승선하여 러일 전쟁을 맞이했다. 일본해 해전 당시에는 순양함 「카사오키」에 승선해 있었다.
어뢰전 수료 후, 사쿠마는 잠수함 지원함 에서 근무했고, 이후 순양함 에서 분대장을 역임했다. 그는 1906년부터 잠수함 부대에 종사하기 시작하여, 먼저 ''4번 잠수함''을 지휘했고, 1908년에는 일본에서 건조한 홀랜드식 ''6번'' 잠수함을 지휘했다.
1910년 4월 15일, 세토 내해 야마구치현 연안에서 훈련 잠항 중 잠수함에 고장이 발생하여 잠수함과 승무원 전원이 사망했다. 이틀 후 일본 당국이 잠수함을 인양했고, 사쿠마의 일기가 발견되었다.
일기에는 사고 원인에 대한 자세한 분석과 함께, 잠수함의 공기가 바닥나기 전에 잠수함과 14명의 승무원을 잃은 것에 대한 메이지 천황에게 사과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일기는 후일 언론 보도를 통해 공개되었고, 사쿠마는 사후 국가 영웅이 되었으며, 일본 제국 해군 내에서 용기와 굳건함의 모범으로 여겨졌다.
1879년 9월 13일, 시가현 삼방군 마에카와무라(현 후쿠이현 삼방상중군 와카사정 기타마에카와)에서 마에카와 신사 신관이자 초등학교 교사였던 사쿠마 가세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후쿠이현립 오바마 보통중학교, 공옥사를 거쳐 해군성에 입성( 해군병학교 29기 입교).
1901년 12월, 해군병학교를 졸업했다. 동기에는 요네우치 미쓰마사 대장(후에 내각총리대신), 다카하시 산키치 대장(연합함대 사령장관), 후지타 나오노리 대장(후에 메이지 신궁宮司를 거쳐 쇼와 천황 시종장) 등이 있었다.
러일 전쟁 후에는 수뢰술 연습소 학생으로 채용되어 수뢰모함 「칸자키」에 근무하고, 또한 제1잠수정 함장, 제4잠수정 함장, 제1함대 참모, 하루카제 구축함장, 순양함 「쓰시마」 분대장을 역임하며 경험을 쌓았다.
1906년, 가와사키 조선소에서 대일본제국이 처음으로 건조한 제6잠수정에서 모리 덴조 함장 밑에서 부함장을 역임했다.
1908년, 제6잠수정 함장으로 승진했다.
1910년 4월 15일, 히로시마만(야마구치현 신미나토 앞바다)에서 반잠항 훈련 중 침몰하여 사쿠마 이하 14명의 승조원 전원이 순직했다.
4월 17일, 잠수정이 인양되었고, 잠수정 내부에서 사쿠마의 유서가 발견되었다. 내용은 같은 해 4월 20일에 발표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같은 날 순직한 승조원 14명 전원의 해군 공장이 해군 기지에서 거행되었다. 같은 해 4월 26일에는 사쿠마의 장례식이 고향인 야무라(구 마에카와무라)의 마에카와 신사에서 마을 장례로 거행되었다.
2. 1. 러일전쟁 참전
사쿠마 쓰토무는 1901년에 해군병학교를 29기로 졸업하고 일본 제국 해군에 임관했다.[5] 러일전쟁에서는 순양함 아즈마, 가사기 등에 배속되어 쓰시마 해전에 참전하였다.[5] 1903년에는 소위로 진급하여 아즈마에 승선하여 러일 전쟁을 맞이했고, 일본해 해전 당시에는 카사오키에 승선해 있었다.3. 잠수함 승조 및 순직
1906년 대위로써 제4잠수정의 정장이 되었으며, 1908년에는 일본이 자체 건조한 최초의 잠수함인 第六潜水艇일본어의 정장이 되었다.[6] 제6잠수정은 일본 최초의 국산 잠수함으로 기술 개발 및 연구를 목적으로 각종 훈련과 실험을 반복했는데, 1910년 4월 15일에도 잠항실험을 위해 오전 10시에 이와쿠니를 떠나 히로시마만으로 향했다. 당시 실험은 굴뚝 부분만을 수면 위로 내놓고 항해하는 것이었는데, 10시 45분 경에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잠수함이 굴뚝 길이보다 더 깊게 잠수하여 열려 있던 굴뚝을 통해 침수가 되기 시작했다. 굴뚝을 막는 장치를 작동시켜 침수를 막으려 했으나 해당 기기가 고장으로 인하여 이를 직접 인력으로 폐쇄해야 했고, 그 사이에 잠수함은 수면하 17m의 해저에 가라앉았다.[7] 잠수함은 내부로 들어온 물로 침수되어 다시 떠오르지 못했고, 다음날인 16일 인양되었으나 사쿠마를 비롯한 승무원 14명은 모두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사쿠마는 유입된 물과 발생하는 유독 가스 등으로 의식이 혼미해지는 가운데에서도 선내의 상황 등을 구체적으로 기록해 남겨 큰 주목을 받았다. 사고가 발생한 10시 45분에 시작된 그의 기록은 12시 40분까지 이어진다.[8] 그는 메이지 천황에게 잠수함의 손실과 부하들의 죽음을 사죄하고, 이어 이 사고가 잠수함 발전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사고 원인 분석을 적은 후 유언을 남겼다.
제6잠수함(第六潜水艇)이 훈련 중 사고[6]를 일으켜 승조원 14명 전원이 순직했다.[7]
순직한 승조원들은 거의 전원이 자신의 위치를 떠나지 않고 사망했으며, 위치를 벗어난 승조원들도 수리에 힘썼다. 사쿠마 자신은 잠수함 내부에 가스가 가득 차 죽음이 임박한 가운데, 잠망경으로 들어오는 미약한 빛 속에서 작은 수첩에 메이지 천황(明治天皇)에게 잠수함의 손실과 부하들의 죽음을 사죄하고, 이어 이 사고가 잠수함 발전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사고 원인 분석을 적은 후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8]
:謹んで陛下に白す
:我が部下ノ遺族ヲシテ窮スルモノ無カラシメ給ハラン事ヲ
:我が念頭ニ懸ルモノ之レアルノミ
그 후, “좌노 제군니 욕직(左ノ諸君ニ宜敷)”이라 하여 사이토 마코토(斎藤実)를 비롯한 당시 상급 간부와 지인들의 이름을 적고, 12시 30분 자신의 상태를, 그리고 “12시 40분 나리(12時40分ナリ)”라고 적고 절명했다. 사쿠마가 적은 유서는 39페이지에 달하는 긴 것이었다. 사쿠마의 상의 주머니에서 발견되어 침몰한 잠수함이 인양된 후에 발표된 유서는 당시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불렀다. 해외(주로 유럽)에서는 같은 종류의 사고가 발생했을 때, 탈출하려는 승조원들이 출입구에 몰려 승조원끼리 서로 죽이는 등의 비참한 상황이 발생했다. 그렇기 때문에 출입구로 몰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수리를 하려고 했던 사쿠마와 승조원들의 모습은 큰 감명을 주었고, 여러 나라에서 많은 조전이 도착했다.
사쿠마의 유서는 39페이지에 달하는 긴 것이었다. 침몰한 잠수함이 인양된 후에 발표된 유서는 당시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불렀다. 해외에서는 같은 종류의 사고가 발생했을 때, 탈출하려는 승조원들이 출입구에 몰려 서로 죽이는 등의 비참한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수리를 하려고 했던 사쿠마와 승조원들의 모습은 큰 감명을 주었고, 여러 나라에서 많은 조전이 도착했다. 국내에서는 오랫동안 수신(修身) 교과서에 “침용(沈勇)”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쓰메 소세키는 사고가 있던 해에 발표한 “문예와 히로이츠쿠(文芸とヒロイツク)” [1]에서 사쿠마의 유서와 그의 죽음에 대해 언급했다.
오늘날에도 사쿠마의 기일인 4월 15일에는 그의 출신지인 와카사정(若狭町)의 사쿠마 기념 교류회관(佐久間記念交流会館)에서 유덕현창제(遺徳顕彰祭)가 거행된다. 해상자위대 마이즈루 지방대(舞鶴地方隊) 마이즈루 음악대(舞鶴音楽隊)의 연주와 영국 대사관 무관(武官)의 연설이 있다. 마찬가지로 구레시 다이노미야 신사(鯛乃宮神社) 경내의 제6호 잠수함 순난비(第六号潜水艇殉難之碑)(잠수함 부품이 보존되어 있다), 전날인 14일에는 이와쿠니시 제6잠수함 순난자 기념비(第六潜水艇殉難者記念碑)에서도 위령식이 거행된다.
3. 1. 제6잠수정 침몰 사고
1906년 대위로써 제4잠수정의 정장이 되었으며, 1908년에는 일본이 자체 건조한 최초의 잠수함인 第六潜水艇일본어의 정장이 되었다.[6] 제6잠수정은 일본 최초의 국산 잠수함으로 기술 개발 및 연구를 목적으로 각종 훈련과 실험을 반복했는데, 1910년 4월 15일에도 잠항실험을 위해 오전 10시에 이와쿠니를 떠나 히로시마만으로 향했다. 당시 실험은 굴뚝 부분만을 수면 위로 내놓고 항해하는 것이었는데, 10시 45분 경에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잠수함이 굴뚝 길이보다 더 깊게 잠수하여 열려 있던 굴뚝을 통해 침수가 되기 시작했다. 굴뚝을 막는 장치를 작동시켜 침수를 막으려 했으나 해당 기기가 고장으로 인하여 이를 직접 인력으로 폐쇄해야 했고, 그 사이에 잠수함은 수면하 17m의 해저에 가라앉았다.[7] 잠수함은 내부로 들어온 물로 침수되어 다시 떠오르지 못했고, 다음날인 16일 인양되었으나 사쿠마를 비롯한 승무원 14명은 모두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사쿠마는 유입된 물과 발생하는 유독 가스 등으로 의식이 혼미해지는 가운데에서도 선내의 상황 등을 구체적으로 기록해 남겨 큰 주목을 받았다. 사고가 발생한 10시 45분에 시작된 그의 기록은 12시 40분까지 이어진다.[8] 그는 메이지 천황에게 잠수함의 손실과 부하들의 죽음을 사죄하고, 이어 이 사고가 잠수함 발전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사고 원인 분석을 적은 후 유언을 남겼다.
사쿠마의 유서는 39페이지에 달하는 긴 것이었다. 침몰한 잠수함이 인양된 후에 발표된 유서는 당시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불렀다. 해외에서는 같은 종류의 사고가 발생했을 때, 탈출하려는 승조원들이 출입구에 몰려 서로 죽이는 등의 비참한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수리를 하려고 했던 사쿠마와 승조원들의 모습은 큰 감명을 주었고, 여러 나라에서 많은 조전이 도착했다. 국내에서는 오랫동안 수신(修身) 교과서에 “침용(沈勇)”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쓰메 소세키는 사고가 있던 해에 발표한 “문예와 히로이츠쿠(文芸とヒロイツク)” [1]에서 사쿠마의 유서와 그의 죽음에 대해 언급했다.
오늘날에도 사쿠마의 기일인 4월 15일에는 그의 출신지인 와카사정(若狭町)의 사쿠마 기념 교류회관(佐久間記念交流会館)에서 유덕현창제(遺徳顕彰祭)가 거행된다. 해상자위대 마이즈루 지방대(舞鶴地方隊) 마이즈루 음악대(舞鶴音楽隊)의 연주와 영국 대사관 무관(武官)의 연설이 있다. 마찬가지로 구레시 다이노미야 신사(鯛乃宮神社) 경내의 제6호 잠수함 순난비(第六号潜水艇殉難之碑)(잠수함 부품이 보존되어 있다), 전날인 14일에는 이와쿠니시 제6잠수함 순난자 기념비(第六潜水艇殉難者記念碑)에서도 위령식이 거행된다.
3. 2. 유서
제6잠수함(第六潜水艇)이 훈련 중 사고[6]를 일으켜 승조원 14명 전원이 순직했다.[7]
순직한 승조원들은 거의 전원이 자신의 위치를 떠나지 않고 사망했으며, 위치를 벗어난 승조원들도 수리에 힘썼다. 사쿠마(佐久間) 자신은 잠수함 내부에 가스가 가득 차 죽음이 임박한 가운데, 잠망경으로 들어오는 미약한 빛 속에서 작은 수첩에 메이지 천황(明治天皇)에게 잠수함의 손실과 부하들의 죽음을 사죄하고, 이어 이 사고가 잠수함 발전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사고 원인 분석을 적은 후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8]
:謹んで陛下に白す
:我が部下ノ遺族ヲシテ窮スルモノ無カラシメ給ハラン事ヲ
:我が念頭ニ懸ルモノ之レアルノミ
그 후, “좌노 제군니 욕직(左ノ諸君ニ宜敷)”이라 하여 사이토 마코토(斎藤実)를 비롯한 당시 상급 간부와 지인들의 이름을 적고, 12시 30분 자신의 상태를, 그리고 “12시 40분 나리(12時40分ナリ)”라고 적고 절명했다. 사쿠마가 적은 유서는 39페이지에 달하는 긴 것이었다. 사쿠마의 상의 주머니에서 발견되어 침몰한 잠수함이 인양된 후에 발표된 유서는 당시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불렀다. 해외(주로 유럽)에서는 같은 종류의 사고가 발생했을 때, 탈출하려는 승조원들이 출입구에 몰려 승조원끼리 서로 죽이는 등의 비참한 상황이 발생했다. 그렇기 때문에 출입구로 몰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수리를 하려고 했던 사쿠마와 승조원들의 모습은 큰 감명을 주었고, 여러 나라에서 많은 조전이 도착했다.
국내에서는 오랫동안 수신(修身) 교과서에 “침용(沈勇)”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는 사고가 있던 해에 발표한 “문예와 히로이츠쿠(文芸とヒロイツク)” [1]에서 사쿠마의 유서와 그의 죽음에 대해 언급했다.
오늘날에도 사쿠마의 기일인 4월 15일에는 그의 출신지인 와카사정(若狭町)의 사쿠마 기념 교류회관(佐久間記念交流会館)에서 유덕현창제(遺徳顕彰祭)가 거행된다. 해상자위대(海上自衛隊) 마이즈루 지방대(舞鶴地方隊) 마이즈루 음악대(舞鶴音楽隊)의 연주와 영국 대사관 무관(武官)의 연설이 있다. 마찬가지로 구레시(呉市) 다이노미야 신사(鯛乃宮神社) 경내의 제6호 잠수함 순난비(第六号潜水艇殉難之碑)(잠수함 부품이 보존되어 있다), 전날인 14일에는 이와쿠니시(岩国市) 제6잠수함 순난자 기념비(第六潜水艇殉難者記念碑)에서도 위령식이 거행된다.
4. 사후
사쿠마 쓰토무는 후쿠이현 미카타군(현재 와카사시)의 신관(神官) 집안에서 태어나 1901년 일본 해군사관학교 제29기를 졸업했다. 러일 전쟁 발발 직전 순양함 아즈마/Azuma영어에 배치되었고, 쓰시마 해전 당시에는 순양함 가사기/Kasagi영어에 탑승했다. 1906년부터 잠수함 부대에 종사하기 시작하여 4번 잠수함, 홀랜드식 6번 잠수함 등을 지휘했다.
1910년 4월 15일, 세토 내해 야마구치현 연안에서 훈련 중 잠수함 고장으로 승무원 전원과 함께 사망했다. 이틀 후 인양된 잠수함에서 발견된 그의 일기는 사고 원인에 대한 분석과 메이지 천황에 대한 사과, 승무원들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일기는 언론에 공개되었고, 사쿠마는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일본 제국 해군 내에서 용기와 굳건함의 모범으로 여겨졌다.
4. 1. 한국과의 관계
5. 서훈
사쿠마 쓰토무는 1903년 4월 10일 정팔위[2], 1904년 8월 30일 종칠위[3], 1906년 11월 30일 정칠위[4]에 서임되었다.
6. 기념
참조
[1]
뉴스
文芸とヒロイツク
https://www.aozora.g[...]
1910-07-19
[2]
간행물
官報
1903-04-11
[3]
간행물
官報
1904-09-03
[4]
간행물
官報
1906-12-01
[5]
문서
사쿠마의 동기 중에는 해군 대신과 총리 대신을 역임하게 될 요나이 미쓰마사도 있다.
[6]
문서
1906년 기준 일본 해군은 7척의 잠수함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제1잠수정부터 제5잠수정까지는 홀란트급이라 불리는 미국에서 건조된 잠수함이며, 제6, 7잠수정은 홀란트개(改)급이라 불리는 자체 건조한 잠수함이었다.
[7]
문서
17일이라는 설도 있다.
[8]
뉴스
해군대위 사쿠마 쓰토무 '투수왕' 노모 히데오
http://shindonga.don[...]
신동아
2008-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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